고독을 춤으로 표현한 팜므 파탈

나는 고전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필름 누와르의 팬은 아니다. “길다(Gilda, 1946)”를 보고 나서도 이 장르가 여전히 어색하고 이해할 수 없었다. 어둠침침한 흑백 배경과 모호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머리가 혼란스럽다. 이런 답답한 상황 속에도 이 장르의 영화를 집중하게 하는 건 주인공이다. 하드보일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남성 호르몬이 넘치는 마초이면서 동시에 나약한 내면을 가진 이중적 캐릭터는 다소 단순한 영화에 깊이를 더한다.

글렌 포드가 맡은 쟈니 파렐은 전형적인 필름 누아르 주인공의 요건을 다 갖추고 있다. 쟈니는 보스에 대한 충성심과 사랑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갈등 속에서 고뇌하는 모습이나 심경의 변화는 영화 속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필름 누아르 장르가 인물의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는 특성이 있지만, 이 영화는 그 암시조차 인색했다. 그게 이야기 전개에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그리고 쟈니는 다른 필름 누아르의 주인공에 비해서 다소 밋밋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아직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다. 바로 리타 헤이워스가 클럽에서 춤을 추며 “Put the Blame on Mame”을 부르는 장면이다. 실제로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은 아니타 커츠 엘리스다. 이 시기에 노래를 더빙하는 건 예사였다. 어려운 노래도 아니었고, 대단한 춤도 아니었던 이 장면이 내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되고 있다.

필름 누아르 영화에 항상 등장하는 여주인공, 팜므 파탈이 바로 길다(리타 헤이워스)다. 그녀는 퇴폐적 매력을 무한대로 발산하면서 영화 속 남자란 남자는 모두 홀리고 다닌다. 리타는 충분히 그런 매력을 갖고 있었다. 이 영화가 흥행하면서 리타의 대표작이 되었지만, 그 이미지가 그녀를 옥죄기도 했다.

자유로운 영혼, 길다는 감옥에 갇힌 죄인 같은 삶을 산다. 그녀는 카지노의 사장 부인으로 풍족한 생활을 하지만 사랑도 자유도 없다. 클럽에서 춤을 추며 남자를 유혹하는 장면은 바로 길다의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야생적 본능을 지닌 길다를 사랑없는 저택에 가두는 것은 예고된 불행이다.

필름 누아르의 이해할 수 없는 팜므 파탈도 알고 보면 폭력적 상황이 나은 산물이다. 팜므 파탈의 성적 매력도 폭력에 대응하여 생긴 병적 반응이다. 길다의 노래와 춤은 알맹이 없는 사랑 속에서 자란 꽃이다. 비록 양분을 잘 먹고 자라긴 했지만 속은 병들어 죽어가는 꽃이다. 모국을 떠나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랑 없는 결혼을 한 길다는 외롭고 슬픈 꽃이다.

리타 헤이워스는 베티 그레이블과 더불어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소중하게 품고 다니던 핀업걸 사진의 모델이었다. 40년대 군인의 우상이자 성적 상징이었던 리타. 그녀의 전성기 시절의 매력을 이 영화에서 마음껏 느낄 수 있다.

성차별이 판타지로 풀릴까

미드 ‘매드맨’은 60년대 여성의 사회진출과 그 속에서 겪는 차별을 진지하게 다뤘다. 영화 ‘나인 투 파이브’가 개봉한 1980년도 여성의 지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그동안 여성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직장 내 여성 인구도 급격하게 늘었다. 이런 사회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성차별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중요한 사회문제다.

이 영화는 남자 직장 상사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세 여자의 유쾌한 복수담이다. 성희롱을 일삼고 노골적으로 성차별하는 못된 직장상사를 골려주는 판타지다. 억눌린 감정을 환상으로 풀어주는 판타지가 이 영화의 주된 주제다. 같은 상사에게 괴롭힘을 당한 세 여자는 우연히 함께 모여 수다를 떨며 자신의 판타지를 공유한다. 그리고 이들은 다음날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터로 복귀한다.

세 여성이 나눴던 수다 속의 판타지가 결국 현실이 되었다. 상사를 묶어서 가두고 직장의 판타지도 하나씩 실현한다. 회사 안에 탁아시설을 갖추고, 출퇴근 시간도 자유롭게 바꾼다. 사무실의 인테리어도 화사하고 예쁘게 바꾼다.

영화 ‘나인 투 파이브’는 뛰어난 작품은 아니지만 80년대 여성의 일상을 코미디 속에서 적절히 묘사했다. 공공의 적이 된 프랭클린 하트(데브니 콜맨)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특히 여자 부하직원을 괴롭히는, 어느 회사에서나 있을 법한 인물이다. 하트 같은 상사의 괴롭힘이 현실 속에서 일어난다면 다수의 여성은 참을 수밖에 없지만, 영화는 정반대의 판타지로 달려간다.

비서와 바람난 남편에게 이혼당하고 가정주부에서 회사원이 된 주디(제인 폰다), 업무능력은 뛰어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매번 승진에서 밀리는 바이올렛(릴리 톰린), 상사의 성희롱을 받으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도랠리(돌리 파튼)는 부당하게 억눌린 채 살아야 하는 운명이다. 이들이 판타지로 폭발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동안 참고 있던 분노가 컸기 때문이다.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하트를 보면 웃음이 터진다. 회사에서 그의 말은 곧 법과 다름이 없었지만, 저택에 갇힌 그가 하는 요구는 아무런 힘도 없다. 시끄럽다는 이유로 입을 틀어막힌다. 고층빌딩에서 추락하는 상상처럼 하트의 삶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다. 하트가 망가질수록 그 즐거움은 더욱 커진다.

로널드 레이건의 보수적인 80년대에 여성운동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성희롱이나 성차별 문제가 빈번했던 1980년에 판타지는 유일한 해방구였을까. 총이나 쥐약 같은 극단적 소재가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폭력적 현실은 폭력적 판타지로 대처하는 게 제맛이다.

여성의 반란, 직장 상사에 대한 복수극이 주는 재미는 시대를 초월한다. 여러 차례 텔레비전 시리즈로 각색하여 방송되었고, 2009년에 돌리 파튼이 음악을 쓴 브로드웨이 뮤지컬 “나인 투 파이브”가 공연되기도 했다.

성차별에 대한 분노를 판타지로 풀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의 현실을 생각하면 씁쓸하다. 직장 상사의 부당한 성희롱이나 차별이 판타지가 아닌 현실로 저항하는 통쾌함이 절실하다.

트위터와 스포츠

김연아 경기를 한다는 소식을 트위터로 알았다. 곧바로 텔레비전을 켜서 채널을 NBC에 맞췄다. 무한도전으로 접한 봅슬레이 경기와 알파인 스키 등이 교차 방송되고 있었다. 저녁 먹고 나서 보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낮 경기였다. 생방송으로 해주는 줄 알았더니 녹화 경기였다. 그냥 텔레비전으로 다른 경기를 지켜보면서 김연아 경기를 기다렸다. 트윗에서 조금 있으면 김연아가 나온다고 해서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봤지만 다른 경기만 보여줬다. 이것도 녹화방송하려는 모양이군. 미국인이 유력한 우승 후보가 아니라서 그런가 생각했다.

경기의 긴장감을 즐기려고 트윗도 끄고 인터넷 창도 닫고 텔레비전만 켜놓았다. 한참 시간이 흘러서야 김연아 경기를 볼 수 있었다. 이미 끝난 경기지만 내게는 생중계와 비슷했다. 경기가 끝나고 트윗을 켜니 엄청난 타임라인이 몰려왔다. 경기에 대한 반응도 읽고 내 생각도 정리하면서 트윗을 읽어 내려갔다.

인터넷이 텔레비전 시청자를 빼앗아간다고 한탄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요즘 추세를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슈퍼볼 중계도 시청률 기록을 세웠고, 그래미 시상식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올림픽 중계 역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텔레비전의 전성기가 돌아왔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인터넷을 하면서 동시에 텔레비전을 즐기는 사람이 나타난 점이다. 텔레비전과 인터넷의 만남이 거실에서 이뤄졌다.

내가 자주 다니던 대중문화 사이트에서도 이미 텔레비전과 인터넷의 융합은 시작되었다고 선언했다. 텔레비전으로 그래미 시상식을 보면서 한쪽에는 노트북으로 트윗을 읽을 수 있었다. 사이트의 운영자가 실시간으로 트윗에 의견을 게시하였다. 생각과 감정의 공유는 트윗의 가장 큰 장점이다. 텔레비전을 함께 보는 사람을 묶어주는 새로운 채널의 탄생이다.

인터넷은 텔레비전의 적이 아니라 친구다. 텔레비전과 인터넷이 함께 힘을 합쳐 올림픽을 즐길 수 있게 도와주었다. 나는 트윗에 자극받아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올림픽 텔레비전 중계를 지켜봤다. 텔레비전으로 구글 검색에 대한 광고도 방송된다.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다뤘던 북극곰의 위기를 구글로 검색하기도 한다. 이런 일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여자 피겨 스케이트가 텔레비전으로 중계되었고, 경기와 함께 해설자의 논평도 트윗으로 중계되었고 그에 관한 생각도 공유되었다. 연아를 윤아로 잘못 발음하는 중계자를 지적하는 트윗도 있었고, 어려운 피겨 스케이트 기술을 평하는 트윗도 보였다. 텔레비전 시청하던 개인적 시간이 마치 호프집에서 어울려 경기를 지켜보는 사교의 시간이 되었다. 나는 거실을 떠나지도 않았는데도 공공장소에 와있는 착각이 든다.

로스트 마지막 시즌

미드 ‘로스트’ 마지막 시즌이 시작되었다. 솔직히 로스트의 시간여행은 그다지 재미도 없었고 이야기의 설득력을 상실한 채 바닷속으로 한없이 표류하는 것만 같았다. 시즌 6은 다시 현실에 발을 디딜 공간을 찾았다. 지루했던 시간여행이 드디어 끝나고, 길고 길었던 어둠의 동굴을 벗어나 바깥세상으로 나왔다.

그동안 시즌 가운데 걸작은 시즌 1이다. 섬 안에 일어나는 일과 각 캐릭터의 과거가 겹쳐지면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팽팽한 긴장감을 주었다. 비록 고립된 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개인적 배경이나 사회적 갈등이 끊임없이 이들을 괴롭히는 상황은 어느 드라마와 견주어도 빠지지 않는다.

판타지의 매력은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달려있다. 현실과 상관없이 벌어지는 환상은 백일몽과 비슷하다. 현실과 짝을 이루지 않은 환상은 가질 수 없는 환상의 매력을  상실한다. 생각만 하면 마음대로 이뤄지는 공상 게임이다. 미스터리와 공상과학의 세계로 깊숙이 들어온 로스트는 희생을 치러야 했다. 공상과학 하드코어 팬을 붙잡은 대신에 일반 시청자는 놓쳤다. 시청률은 시즌이 진행될수록 떨어졌다.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팬들은 떠나고 그 자리를 골수팬들이 차지했다.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섬이 살아서 시간여행까지 하는 이야기는 보통 공상과학 팬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행인지 마지막 시즌에서 다시 현실이 등장한다. 시간이 둘로 쪼개진 것이다. 추락하지 않고 무사히 LA에 도착한 로스트 캐릭터의 시간과 여전히 섬에 남아서 운명에 맞서야 하는 시간이 평행선을 그린다. 두 시간대가 겹쳐지지 않고 계속해서 평행선을 그리게 될지, 하나로 다시 합쳐질지, 아니면 몇 개로 다시 쪼개질지는 지켜봐야 한다.

만약 비행기가 추락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로스트의 다른 한 축을 이루면서 진행될 추락하지 않은 삶은 어떨지 궁금하다. 이들의 삶이 추락한 삶과 어떤 관계를 맺을까. 어느 쪽이 현실이고, 어느 쪽이 환상일까. 과연 마지막 회에 이 모든 의문이 풀리긴 할까. 짐작하기 쉽지 않은 결말이라서 기대가 된다.

젊은 독자층이 미국 출판시장을 좌우

작년 미국 베스트셀러 책을 중심으로 출판계를 파악하자면 대체로 독자 연령층이 확실히 젊어졌다. 단연 눈에 띄는 작가는 “트와일라잇”을 쓴 스테파니 마이어다. 그녀의 뱀파이어 삼부작이 베스트셀러 1위부터 3위까지 휩쓸었다. 섹시한 뱀파이어와 사랑에 빠진 10대 여성 독자층이 베스트셀러로 끌어올려 준 셈이다. 작품성보다는 주제 선정이 아주 탁월했다. 금기된 10대의 사랑에 대한 내부적 갈등을 뱀파이어와 결합한 독특한 주제는 극적 효과가 있다. 이 작품은 작가 꾼 꿈에서 영감을 받아서 쓰기 시작한 것이었다고 한다.

주목할만한 또 다른 책으로 “윔피 키드” 시리즈가 있다. 제프 키니 책의 독자는 스테파니 마이어의 독자층보다 어리지만 의외로 나이 든 사람도 좋아한다. 나무 작대기처럼 마른 국민 약골 주인공의 성장기다. 간단히 말하자면, 평범한 아이의 평범하지 않은 정신세계를 다룬다. 그림체가 세련된 건 아니지만 관점은 새롭다. 착하기만 어린이의 시점이 아닌 약간 삐딱한 관점이다. 벌써 4번째 책이 작년에 나왔고 앞으로 시리즈가 계속될 예정이다. 고백하자면 나도 이 책을 보았는데 단숨에 읽어버렸다.

10위 오른 모리스 샌닥의 그림책은 1988년에 나왔지만, 올해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다시 흥행한 작품이다. 모여라 꿈동산에 나올 법한 대두 괴물과 친구가 된 소년 이야기다. 10위권 안에 6권이나 아이들을 위한 책이다. 어른이 되어 점점 책을 읽지 않게 된 건지, 아이들이 점점 더 책을 많이 읽게 된 일이지 알 수 없지만 책읽는 나이가 어려진 건 고무적이다.

전통 매체의 고질적인 문제 가운데 노령화를 꼽을 수 있다. 젊은 피가 수혈되지 않은 장르의 매체는 상업적으로 약해지고 그와 더불어 사회적 영향력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향유층이 늙어서 죽으면서 그 매체도 함께 늙어가며 역사 속으로 사라질 확률이 아주 높다. 클래식 음악이 청소년층 유입을 위해서 그토록 노력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책도 마찬가지로 영화, 게임, 인터넷에 밀려서 십 대 인구에게 천대받는 현실이다.

2009년은 영화의 도움을 받은 책이 유난히 많은 한 해였다. 스테파니 마이어와 모리스 샌닥의 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시간 여행자의 아내도 영화로 각색되었다. 영화가 책의 판매를 도와주었다. 영화를 보고 마음에 들어 원작소설을 찾아서 읽게 되는 건 당연한 현상이다. 영화는 책뿐 아니라 음반 판매에도 이바지하였다.

미디어 융합은 앞으로 다가올 시대의 경향이다. 영화뿐 아니라 인터넷이나 다른 뉴미디어와 전통 매체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게 될 것이다. 트위터가 영화 흥행을 주도하는 시대가 되었고, 인터넷 팬클럽이 드라마 이야기 전개에도 영향을 준다. 매체를 넘나드는 성공기는 이제 드문 일이 아니다.

젊어진 독자층과 뉴미디어의 후원이 2009년 미국 출판시장을 읽는 코드라고 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 출판시장 상황이 좋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는 책의 모험은 흥미롭다. 2010년은 전자책 열풍이 한바탕 몰아칠 기미가 보이고,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되는 책의 소식도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도서관의 어린이 서가가 점점 커지는 것도 미래의 자양분이다.

2009년 베스트셀러 책 (미국)

  1. Breaking Dawn – Stephenie Meyer
  2. Eclipse – Stephenie Meyer
  3. Twilight – Stephenie Meyer
  4. Last Straw (Wimpy Kid #3) – Jeff Kinney
  5. Shack – Paul W. Young
  6. Dog Days (Wimpy Kid #4) – Jeff Kinney
  7. Act Like a Lady, Think Like a man – Steve Harvey
  8. Going Rogue – Sarah Palin
  9. Time Traveler’s Wife – A. Niffenegger
  10. Where the Wild Things are – Maurice Sendak

누구나 사랑할 수 있다

우디 앨런이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다. 그는 최근 몇 년간 유럽을 배경으로 영화를 찍으며 새로운 형식을 실험하다가 그의 전형적인 뉴욕 유대인 코미디로 복귀했다. 세상에 대한 불평불만이 끝도 없어서 잠시도 참지 못하는 지식인 노인과 아름답고 성격까지 좋은 젊은 여자친구가 티격태격 다투며 사랑하는 영화. 우디 앨런의 팬이라면 초반 5분만 봐도 단숨에 그의 영화라는 걸 쉽게 눈치챌 수 있는 영화가 “왓에버 웍스”다.

보리스(래리 데이빗)는 컬럼비아대학 물리학 교수로 일하다가 은퇴하고 친구들과 카페에서 어울려 잡담하며 말년을 보내고 있다. 그는 노벨상을 거의 탈 만한 두뇌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며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이기적 지식인이다. 우디 앨런의 분신인 보리스는 뉴욕을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며 멍청하고 비합리적인 사람이 넘쳐나는 세상을 조롱한다. 잘난 척하는 보리스의 현실은 참담하다. 그는 바람난 아내와 이혼하고 그 때문에 자살을 시도했지만, 그마저도 실패한다.

세상을 우습게 보는 보리스는 웃음거리가 된다. 보리스는 자신을 스스로 천재라고 말하지만, 아이처럼 무서운 꿈에 놀라서 쩔쩔매기도 한다. 그는 멍청하다고 놀리던 멜로디(에반 레이첼 우드)를 사랑해서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세수할 때마다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는 기이한 행동도 그의 괴짜 행적에 이바지한다.

멜로디는 남부 미시시피주에서 무턱대고 뉴욕으로 와서 우연히 보리스를 만난다. 그녀는 미인대회에 나갈 미모를 갖췄지만 똑똑한 편은 못 되었다. 그녀는 보리스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고 반대 성향만 가졌다. 다행히 그녀는 보리스의 괴팍한 성격을 다 받아주고 그의 두뇌를 존경할 넓은 마음을 가졌다.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보리스의 성격을 다 받아줄 만한 사람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예기치 않은 일이 연이어 일어난다. 멜로디의 엄마와 아빠가 뉴욕으로 상경하여 자아를 찾아가는 또 다른 이야기도 재미있다. 남부의 종교적 보수적 세계를 벗어난 이들은 뉴욕의 자유로운 생활에 젖어가면서 모르고 있던 자신의 재능이나 정체성을 깨닫는다. 뉴욕이란 장소가 주는 힘이 영화에 개입하는 지점이다. 뉴욕에만 가면 사람이 변한다는 이야기란 말인가? 뉴욕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영화로 보여준 우디 앨런이니까 그런 생각도 해볼 만하다.

멜로디와 보리스의 사랑도 아주 예외적 관계다. 60대 노인과 20대 여인이 사랑하는 일은 아주 드물다. 비록 나이 차이를 극복하더라도 학력 차이도 벽처럼 단단하다. 클래식 음악과 고전 영화만 좋아하는 보리스의 취향과 메탈음악과 춤추는 걸 좋아하는 멜로디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른다. 하지만 사람 일이란 건 한 치 앞도 모르는 법이다. 멜로디와 보리스는 수많은 차이를 극복하고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이 영화의 운명도 무질서와 혼돈 속에서 탄생했다. 우디 앨런이 30년 전에 제로 모스텔이란 코미디 배우를 위해 대본을 썼지만, 그가 죽는 바람에 지금에서야 만들어졌다. 3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뉴욕도 변했고 세상도 달라졌다. 2000년대 후반의 뉴욕 정서를 담으려고 노력했지만, 여전히 70년대의 뉴욕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어떤 관객은 향수로 이 영화를 즐길 수 있고, 다른 이는 시대와 상관없는 노인의 판타지로 볼 수도 있다.

“왓에버 웍스”는 우디 앨런 최고의 작품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의 전형적 감수성이 다 표현된 대표작인 것은 틀림없다. “섹스 앤드 더 시티”가 패션을 사랑하는 30대 여자의 정서를 표현한 작품이라면 이 영화와 우디 앨런의 다른 뉴욕 영화는 지식인의 사랑과 일상의 절정이다. 캐리와 우디가 만나서 사랑한다면 어떨까? 왕자님을 꿈꾸는 캐리가 염세적이고 냉소적 우디를 좋아할 이유도 아마 없을 것이다. 우디의 성격을 다 받아줄 만한 아량이 캐리에겐 없다. 캐리는 우디와 뉴욕 어느 커피집에서 대판 싸우고 쿨하게 헤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디 앨런 영화에는 수다스럽고 냉소적인 지식인이 자주 등장한다. 우디 자신의 분신이기도 한 주인공은 직설적으로 할 말을 다 하는 편이다. 비슷한 성향의 영화감독으로 한국의 홍상수 감독과 프랑스의 에릭 로메르를 꼽을 수 있다. 물론 영화적 스타일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에게 공통점도 있다. 모두 지식인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를 많이 만들었다. 감독의 시각을 대변하는 인물을 빌어서 세상을 풍자하거나 지식인 자신을 까발리기도 한다. 보리스가 카메라를 향해서 말하는 대화는 직설화법으로 관객에게 말 걸기다. 그 대화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이어지고 수다는 그치지 않는다. 보리스의 앵앵거리는 말투가 아직도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마르크스와 코카콜라

사회주의 혁명을 믿는 청년이 가수의 꿈을 가진 소녀와 사랑에 빠진다. 이 영화는 너무나 다른 사회의식을 가진 두 사람이 만나서 사랑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다시 사랑하는 이야기다. 68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시대적 불안이 주된 배경이다. 첫 장면부터 아내를 떠나려는 남자를 총으로 쏘는 아내가 등장한다. 폭력으로 물든 프랑스 파리, 베트남 전쟁 탓에 황폐한 세계에도 사랑은 꽃피어난다.

“남성, 여성”은 주크박스, 핀볼, 비틀스, 그리고 밥 딜런의 시대를 충실히 기록한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다. 탄탄하게 짜인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자칫하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청춘남녀의 사랑의 궤적을 따라서 내면의 감정을 파고들면 풍부한 드라마가 드러난다. 이 영화는 요즘의 시각으로 봐도 다소 파격적인 동거, 섹스, 혼전 임신, 낙태를 모두 다루고 있다. 카메라는 내면을 파고들지 않은 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담담하게 기록한다.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 폴은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이 만든 “400번의 쿠타”의 주연배우 장 피에르 레오가 맡았다. 여자 주연 마들렌은 가수로 활동하던 샹탈 고야가 연기했다. 폴과 레오의 관계는 15개 소제목 가운데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리는 마르크스와 코카콜라의 아이들이다.” 공산주의자 폴은 마르크스의 자녀이며, 가수 지망생 모델 마들렌은 코카콜라의 자녀다. 하나는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는 혁명을 기다렸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하는 날을 기다렸다. 이 둘의 만남 자체가 서로 뒤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관계였다.

폴은 세상이 변화하기를 바라는 이상주의자였다. 그러나 그가 직면한 현실은 녹녹하지 않았다. 그는 친구와 정치토론을 하거나 거리 벽에 낙서하는 일로 세상에 대한 불만을 풀었다. 1960년대의 프랑스의 지식인들이 했던 것처럼 영화관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스크린에서 자유를 느꼈지만, 억압적 현실에 염증을 느꼈다. 자동차 소리나 시끄러운 거리의 소음이 들리는 카페에서 사랑, 섹스,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폴은 60년대 청년의 모습이다. 비정한 현실을 원망했지만 그곳에서 살짝 벗어난 부르주와 지식인의 삶.

정치적인 폴이나 정치에 전혀 관심없는 마들렌이나 모두 60년대의 젊은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방식이 약간 다를 뿐이지 극단적 차이가 있는 건 아니다. 폴과 마들렌의 사랑은 세상 속의 개인적 관계일 뿐이지 세상을 바꾸는 일과 관계가 없다. 영화 속에 폴과 마들렌이 침대에 누워있는데 바로 그 옆에 마들렌의 친구가 누워서 책을 보는 장면이 있다. 마들렌과 폴이 나누는 사랑과 친구의 독서는 서로 섞이지 않는다. 사랑은 사회적 관계가 아닌 개인적 감정의 몰입이다.

영화적 삶은 현실적 삶이랑 섞이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혁명의 꿈을 꾸었지만, 현실에서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좌절한다. 어쩌면 폴이 하는 사랑은 한없이 미끄러지는 추락의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폴은 사회적 삶이나 세상의 폭력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그는 편안한 집이나 어둑어둑한 영화관에서 안식을 느꼈다. 그러다가 바깥으로 나오면 달라진 세상이나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 영화는 2005년 미국에서 다시 개봉되었다. 2000년대의 폴이라면 어떻게 사랑했을까? 세상은 자본주의 사회를 향해 달리고 폴 같은 좌파는 소수가 되었다. 폴이 마들렌 같은 여자를 만날 확률은 아주 희박하다. 그동안 세상은 달라졌고 폴과 마들렌의 간격은 더욱 넓어졌다. 만약 2000년대의 폴과 마들렌의 사랑을 영화로 만든다면 이들의 극적인 사랑은 이라크전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깔리고 뉴욕 맨해튼이 배경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은 달라진 듯하지만, 그 내면 풍경은 아주 흡사하다.

무한도전 미안하디 미안하다

무한도전 음식특집은 재미있고 의미 있는 방송이었지만 논란도 많은 방송이었다. 처음부터 길이 음식을 가지고 장난친다고 시청자의 비난을 온몸으로 받았다. 음식을 소중하게 여기는 한국 문화에서 그런 비난은 충분히 가능했다. 어쩌면 이런 비난은 모든 분야에 도전하면서 웃음을 끌어내야만 하는 무한도전이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이었다. 음식이라곤 해본 적 거의 없는 사람이 배우면서 하는 실수는 너그럽게 봐줄 수도 있다. 길은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성실한 일등 요리사로 거듭났다.

두 번째 바통을 넘겨받은 이는 바로 정준하였다. 나중이었지만 그 비난은 첫 번째와 비교할 수 없는 큰 물결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입방아에 오른 전력이 있어서 이번 광풍이 더 크게 불었다. 정준하는 개수대를 막히게 해놓고 명 셰프에게 막힌 구멍을 뚫으라고 하는 예의 없는 행동을 저질렀다. 게다가 자신이 한 잘못은 인정하지 않은 채 끝까지 자기 고집만 피우다가 팀 분위기만 험악하게 했다.

무한도전을 보면서 정준하의 행동에 약간 짜증이 났는데 뜻밖의 반전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무한도전 멤버가 비틀스의 노래 Ob-La-Di, Ob-La_Da를 개사한 “미안하디 미안하다”를 부르는 순간 짜증이 웃음과 함께 녹고 말았다. 사람이 실수하고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문제다. 하지만 이 노래는 웃음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있다. 김태호 피디는 코미디로 일어난 논란은 코미디로 재치있게 풀었다. 정준하가 노래 부를 때 웃음이 더욱 절정을 치달린다. 이 노래의 사실상 주인공은 정준하이기 때문이다.

깜짝쇼로 들어간 미안하다송은 반전의 묘미와 웃음도 한꺼번에 잡은 화룡점정이었다. 무한도전이 패러디 노래를 부른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소녀시대, 빅뱅, 장기하와 얼굴들의 노래도 부른 적이 있었지만 이번처럼 프로그램 내용 자체가 결합한 적은 없었다. 미안하다송은 음식특집의 주제곡이면서, 한편의 뮤직 드라마이면서, 웃음과 미안함이 섞인 패러디 노래다.

정준하나 길이 한 잘못보다 더 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뉘우치지 않는 자들이 수두룩한 세상이다. 미안하다고 인정하는 일도 어려워 자신이 한 일이 정당하다고 변명하기 우기는 이들이 있다. 잘못한 일을 바로잡기 위해서 정치인은 정책으로, 기업은 상품으로, 예술인은 작품으로 사과하는 일은 얼마나 멋진가.

원곡을 안 듣고 넘어갈 수는 없다. 이 노래 제목은 나이지리아 콩가 연주자 지미 스콧이 한 말에서 빌려왔다. “오블라디 오블라다”는 아무리 힘든 일이 있더라도 인생은 계속되다는 뜻이다. 원곡의 제목처럼 역경 속에서도 힘내서 열심히 살자는 무도의 다짐으로 들린다.

파머스마켓 기사 후기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쓰려고 농민 장터(파머스마켓)에 다녀온 기억의 기록이다. 파머스마켓은 콜로라도 볼더에 살 때도 몇 번 가본 적이 있었고, 위스콘신 매디슨에서도 잠시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도시에 따라서 조금 다른 특색이 있긴 했지만 대체로 비슷한 구석이 있다. 주변 농촌에서 가져온 신선한 농산물을 사고파는 정겨운 풍경은 한결같다.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분위기에 취해서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새 장이 파할 시간이 되었다. 아마도 그런 좋았던 기억 때문에 기사를 쓰게 되었는지 모른다.

가을이 성큼 다가온 화창한 날씨 탓인지 거리에는 사람들이 붐볐다. 대부분 파머스마켓은 야외에서 해서 비가 오거나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에는 사람이 별로 없는 편이다. 도심 근처에 있는 파이어니어 공원 주변은 평일에는 주차공간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근처 식당이 널찍한 주차장을 무료로 제공해줘서 어렵지 않게 차를 세우고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하얀 천막으로 가지런하게 정돈된 임시가게가 입구부터 펼쳐졌다. 인파를 따라서 조금씩 안으로 들어가니 음식을 파는 구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아직 점심 전이라서 허기졌다. 맛있어 보이는 빵을 두 개 사서 아내랑 사이좋게 나눠 먹으며 파머스마켓을 구석구석 돌아봤다. 슈퍼마켓에서 볼 수 있던 농산물이 다수였지만 신선도에서 차이가 났다. 슈퍼마켓의 농산물은 먼 지역에서 오니 채 익기도 전에 수확한 것도 있고 긴 여행으로 이미 시들기 시작한 것도 있다. 파머스마켓의 물건은 장터에 나오기 얼마 전에 거둬들인 물건이라서 아주 싱싱하고 흙내음까지 풍겼다.

파머스마켓에서 사람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다. 농산물에 관하여 물어보는 사람도 있으며, 가격 흥정을 하는 이들도 있었고, 그냥 일상사를 공유하는 이들도 있었다. 농산물을 직접 키우고 재배한 사람들 만나는 경험은 계산대에서 점원과 나누는 대화가 전부인 슈퍼마켓의 일상과 바꿀 수 없다.

공원 구석구석에 자리 잡은 농민 장터와 마주한 수공예품 장터도 덤으로 볼 수 있었다. 손으로 직접 짠 퀼트 장식이 너무나 예뻐서 한참을 구경했다. 그 옆 가게는 손으로 짠 스웨터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미술품과 귀걸이까지 산책로를 따라서 멋지게 펼쳐져 있었다. 여느 미술관 못지않은 작품을 야외에서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것도 농민 장터의 즐거움이었다.

대충 한 바퀴를 돌고 나서 공원 중앙광장에서 열린 음악회를 보러 갔다. 잔디밭에 아무렇게나 앉아서 음악을 들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로 옆 청년은 의자에 앉아서 공연하는 밴드를 스케치북에 그리고 있었다. 미대생인지 재빠른 손놀림으로 음악을 스케치로 잡고 있었다. 우리 뒤에는 아이를 목말 태운 아저씨가 지그시 눈을 감고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다. 꽤 많은 사람이 몰려와 음악을 듣고 있었지만 복잡한 가운데 나름 질서 있는 군중이었다.

장터에서 음악공연이 빠지면 어쩐지 심심하다. 동네 지역신문사가 후원하고 지역밴드가 공연하는 즉석 음악축제는 농민장터의 배경음악이 된다. 너바나의 “All Apologies”를 생음악을 들을 수 있어서 기뻤다. 주로 유명한 음악을 들려주었지만 나중에는 자신들이 작곡한 음악도 선보였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이곳은 밴드 자신의 음악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구경하고 음악을 즐기는 사이에 시간이 금방 흘러갔다. 장이 파하기 전에 사진이라도 몇 장 더 찍으려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에게 풍선으로 자전거를 만들어 주는 피에로를 봤다. 그 옆에서 처음 보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거대한 악기는 입으로 불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장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공들인 화음이 멋지게 흘러나와 아이들의 귀를 간지럽혔다. 장터의 작은 일상까지 글로 담으려면 한두 번의 방문으로 어림도 없다.

삭막한 도시 한복판에서 농민을 만날 수 있는 일은 흔하지 않다. 공동체가 약해지고 개인주의적 생활에 익숙한 미국인에게 파머스마켓은 아련한 향수를 자극하는 동시에 건강한 먹을거리도 마련해 주었다. 서로 멀어져가던 도시와 농촌이 다시 만났다. 파머스마켓은 단순히 신선한 농산물을 살 수 있는 실용적 공간을 넘어서 음악과 각종 행사를 즐길 수 있는 문화공간이 되었다. 미국을 여행할 계획을 세우는 분이 있다면 주말에 시간을 내어 농민장터를 꼭 구경할 것을 권하고 싶다. 미 전역에 5천여 개가 넘는 농민장터가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으니까 그곳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그곳에서 또 다른 미국을 발견할 수 있다.

키도 경쟁력이 된 사회

KBS “미녀들의 수다”에 출연한 한 여대생이 “키가 180이 안 되는 사람은 루져”라는 말을 해서 논란이 되었다. 외모나 겉모습이 점점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회에서 이런 생각이 유별난 것은 아니다. 공개적 장소에서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것을 입에 담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요즘 기준으로 ‘루져’가 되지 않으려면 키는 커야 하고 몸은 말라야 하고 얼굴은 작아야 한다. 슈퍼모델에 가까운 몸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루져가 된다. 르네상스 시대라면 풍만한 몸이 이상적인 몸이겠지만 요즘은 잡지 화보에 등장하는 가늘고, 길고, 탄탄한 몸이 승자다.

“루져(Loser)”는 미국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흔하게 쓰이는 말이다. 경쟁이 일상화된 미국 사회에서 가장 모욕적인 단어 중에 하나가 바로 루져다. 하루하루가 경쟁의 연속인 사회에서 루져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경쟁에서 성공하는 이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루져라는 말이 이렇게 흔하게 쓰인다면 이미 경쟁 사회로 진입한 것이다.

루져 발언이 사회적 문제가 된 한국도 경쟁 사회로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대학은 교양이나 학문을 닦는 장이 아니라 취업 준비 학원이 되었다. 토익점수로 영어 실력을 늘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전자제품에나 쓰던 스펙이란 말이 그 사람의 능력을 뜻하게 되었다. 사람을 판단할 때도 내면이나 사람됨을 따지기보다 숫자로 확인 가능한 토익점수나 학점이면 충분한 사회가 되었다. 경쟁에서 밀리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스펙을 높여야 하는 각박한 경쟁 사회가 되었다.

이제 외모나 겉모습도 루져를 정의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경쟁에 밀리지 않기 위해서 키높이 구두를 신어야 하고 성형도 해야 한다. 경쟁에 밀려서 루져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다. 선천적으로 어느 정도 타고나는 키마저도 루져의 범주에 들어가야 하는 현실은 숨 막힌다. 루져 발언에 화를 내는 정도는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비례한다. 과연 그 후폭풍은 무서울 정도였다.

어릴 때부터 학력평가와 영어점수로 평가하고 높은 순위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에 길들여진 사람에게 루져라는 말은 무시무시한 단어가 아닐 수 없다. 이미 다 자란 키 때문에 루져라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니 억울하다. 그렇게 화가 나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분노가 한 여자에게 핵폭탄이 되었다. 그 발언과 상관없는 사생활이 털리고 주변 사람들과 학교까지 괴롭히는 상황은 정상이 아니다. 그 분노는 금기된 루져 발언을 한 사람이 아닌 경쟁 사회라는 괴물에게 쏟아져야 마땅하다.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 경쟁은 필요한 걸까? 경쟁을 우선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지구상에서 가장 효율적인 경제 제도인가? 예를 들어, 수백 개의 기업이 한 제품시장에서 경쟁을 시작하게 되면 수많은 경쟁의 결과로 결국 한두 기업만 남게 된다. 이때부터 경쟁은 의미가 없어지고 독과점이 된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한 기업이 마음대로 가격을 올려도 소비자는 다른 대안없이 그 물건을 살 수밖에 없다. 이게 효율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경쟁이라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소수에게 양심이나 윤리를 기대하는 건 무리다. 경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상대를 이기는 것이지 함께 잘 사는 문제가 아니다.

경쟁 말고도 다양한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 다 함께 서로 도우며 사는 방식에서 나온 게 복지다. 경쟁 신화에 찌든 미국도 의료보험을 개혁하여 공공복지개념을 도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경쟁만으로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는 없었다. 상대를 무너뜨리고 살아남는 경쟁에서 장애인, 노숙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 약자는 숨 쉴 수도 없다. 이들의 숨통을 틔워주고 함께 살 방법도 있는데 경쟁만 강요하는 건 옳지 못하다.

모든 경쟁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모든 일을 경쟁으로만 해결하려는 것이 잘못이다. 패자를 패자로 부르며 놀리는 사회는 이미 병든 사회다. 루져 혹은 패자를 모욕하는 말을 한 학생의 잘못만 나무라고 그 뒤에 버티고 서있는 경쟁 사회에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 외모뿐 아니라 모든 것에 줄을 세우고 순위를 매기는 사회는 잔인한 괴물이다. 180이라는 숫자는 토익 950점이 되고, 거기에 미달하는 사람을 루져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물어선 안 된다. 경쟁신화가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사회는 수많은 루져를 만든다.

연애 상대를 고르는 개인적 취향인 키나 외모에도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경쟁 논리가 개입되는 세상이다.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잣대가 인간의 몸으로 옮겨가는 사회는 경쟁 사회의 결정판이다. 몸도 마음도 승리를 향해 달려가야 하는 현실은 고달프고 슬프다.